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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art GALLERY

살롱드아트 홍미희 개인전 ‘불가분의 관계’ 평론
반복을 통한 다층적 관계와 평평한 집적 - ‘저부조 회화’에서 읽는 존재론적 진술

예술의 역사는 물질에서 정신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조각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음악, 문학, 철학으로 변화한다. 그러면서 점차 예술의 물질적 매체를 통한 존재는 희미해진다. 그리곤 끝내 아이디어만으로도 예술인 시대가 열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1)의 도래(到來)이다.
1910년대부터 그 흔적들이 엿보이긴 하나, 결정적으로 개념미술의 도화선이 된 건 1960년대 팝아트(pop art)와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팝아티스트와 미니멀리스트들의 작품은 사물과 거의 구분되지 않으며, 누보레알리즘(Nouveau Realisme)2)을 포함한 일련의 작가들은 굳이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내는 창작태도에마저 의구심을 품는다. 심지어 사물과 작품 간 차이가 없다면, 더 이상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로까지 치닫는다.
에드워드 키엔홀츠(Edward Kienholz)의 ‘개념 타블로’(concept tableaux)에서마냥 이제 조각가나 화가는 작품의 물성을 최대한 내려놓고, 조셉 쿠수스(Joseph Kosuth)3)처럼 전시회에 출품하는 방식을 벗어나 아예 잡지에 기고하여 출판하는 것을 예술행위로 삼는다. 예술의 점화 또한 변화되어, 작품을 낳게 하는 아이디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을 작품으로 규정하는 아이디어일 때 가장 의미적일 수 있음이 강조된다.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 여타 미술 흐름을 서두에 나열한 이유는 작가 홍미희의 작품을 심도 있게 분석하기 위함이다. 표면적인 혹은 망막 위주의 시각적 관점에서의 단순한 접근을 우회시키려는 의도도 있다. 이는 그만큼 작품에 내재된 여백과 행간, 조형에 침잠된 측면을 파악하는 게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선 홍미희의 작품은 단순한 색깔이 도포된 회화라는 사실에서 언뜻 195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된 기하학적 추상인 하드에지(hard-edge) 계열의 작품으로 읽힌다. 2018년 이후 발표된 <Layers No> 시리즈(‘RB~’, ‘BR~’ 등의 숫자를 붙인 작업)에서 엿보이듯 형태가 화면 전체이므로 분할이 불가능할뿐더러 매우 평면적이고 차갑다.
그의 작품들은 시각적‧심미적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고 근본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미니멀리즘과도 연관된다. 특히 아이디어는 미술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개념미술과도 거리를 두지 않는다. 한 미술가가 어떤 미술형식을 사용할 때 모든 계획과 결정은 이미 사전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제작을 실행하는 일은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위 거론된 예술흐름 및 사조와 홍미희의 작업은 연관성이 높지 않다. 예를 들어 하드에지의 경우 범위와 경계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Halfway PG2-a1, b1, c1>(2018)를 비롯해 <Halfway GP2-a2, b2, c2>(2018), <Yellow Shadow>(2018), <City>(2017) 등의 일부 병치작업을 제외하면 ‘가장자리(edge)’에 대한 강조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은 균등한 형식과 수평·수직적 구조를 지닌다.
홍미희의 작품들은 미니멀리즘에 귀속된다고도 보기 어렵다.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하고 감정을 극도로 절제한 채 기하학적인 뼈대만을 표현하는 제한적 형태의 작품이라는 부분에선 닮은꼴을 띠지만, 사각형 화면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 공간으로의 확대와 타자의 반응, 상황, 현상까지 염두에 둔 작업이라는 점, 특정 사물 자체보단 회화를 바라보는 방식에 무게가 있다는 점에서 본래부터 가진 사물의 특성 제시를 중시하는 미니멀리즘과 상이한 지점이 있다.
홍미희의 작업은 비물질적 측면 보다는 물질적 측면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개념미술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형식(작품)과 내용(개념)은 절대적 균형을 이루며, 언어적 의미와 제작이념에 종속되거나 작가의 사고 자체가 전면에 등장하는 경향과도 간극을 둔다. 또한 개념미술에서의 레디 메이드(ready-made)는 그의 주요 표현 장치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작가는 오늘도 (고집스럽게, 미련 맞게)직접 손으로 일일이 그리고 만들며 쌓아 올려 다듬는 회화적 행위를 작업의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홍미희의 작업은 형식면에서 여러 미술 흐름과 사조를 연상케 함을 부정하긴 쉽지 않으나, 완벽한 접목으로 규정하기 힘들다. 굳이 빗대자면 단일한 색채와 장식적 패턴, 입체에 가까운 작품조차도 회화로 정의한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를 비롯한 몇몇 작가에게서 읽히는 조형방식이 떠오르긴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창작의 한 과정일 뿐이다.(물론 그럼에도 기존 미술사적 기념비에 해당하는 예와 거리감을 넓히려는 노력과 시도는 이어져야 한다.)
작가는 되레 자신의 작업을 ‘탈 장르화’라 말한다. ‘저(低)부조 회화’로 명명한다.4) 우린 그의 ‘탈 장르화’라는 용어를 통해 홍미희의 작업이 일부 미술흐름과의 근친성을 배척하진 못하더라도 시점(視點)과 조형을 통한 발성의 차이5)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부조 회화’라는 용어에서는 자신만의 언어화된 방식이 확인된다. 비록 ‘저부조 회화’라는 단어자체는 독자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회화이나 입체 같은, 입체이자 회화적인 공유지대(between)를 보여줌으로서 ‘보는 것’에 관한 이해와 예술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배어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홍미희의 작업은 다소 경직된 형태를 바탕으로 한 색과 선, 이차원과 삼차원성 등 조형적 본질에 집중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네모반듯한 사각형 형태(<Remnants of The painting>(2018) 시리즈를 포함한 거의 모든 작품이 사각형이다.)의 화면은 기하학성으로 인해 정적인, 허나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유발한다. 일일이 손으로 수없이 반복하여 겹겹이 포갠 레이어(layer)는 건조함을 머금지만, 중첩효과로 인한 이지적인 상황과 입체감을 통한 회화의 실재성(實在性)을 증명한다.
이 가운데 독립된 카드보드들이 샌딩(sanding)된 후 누적되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과정에서의 ‘반복적 행위’는 홍미희 스스로의 미적 정당성을 낳고, 미적 정당성은 다시 예술존재와 작품의 정당성을 매개한다.(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예술이란 다분히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비지각적 존재일 수 있다면 행위의 정당성은 반드시 지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행위는 순간적, 소비적일 수 있으나 작품은 그 순간을 포박한다는 사실이다. 홍미희의 작업을 말하며 이 부분을 누락할 수 없다.)
정당성의 배경엔 휘발되는 행위와 로고스(Logos)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몸을 통한 기록으로써의 행위가 병치되어 있다.(참고로 행위의 기록성과 로고스적 개념은 <Vertical Space> 시리즈(2020)나, <Horizontal Space>(2020)연작에서도 매한가지이다. 다만 이 연작은 빛과 공기, 대기의 순환에 따라 시각적, 감각적 반향의 폭이 수축 및 확장한다는 게 눈에 띈다.)
거의 연구에 가깝도록 고유한 분류체계 아래 설정(조색)되는 색6)은 작가가 유독 공들이고 있는 조형요소이다. 종이나 캔버스 천, 캔버스 프레임 등 재료에 따라 유동하거나 변화하는 색은 인식 범위 밖의 감흥을 심어주고, 부드러운 색감은 심리적 안정감을 선사한다.
반면 <Between Green painting and pink shadow>(2018)과 <Between Blue-painting&Pink-shadow>(2018)에서마냥 악센트(accent)같은 보색 대비는 냉정한 균등과 질서를 품은 뾰족함(punctum)이 있다.(뾰족함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이는 표상이고, 보이는 표상은 보이지 않는 삶의 내재율(內在律)의 대체로 봐도 무리는 없다.)
형태와 색에 이어 또 하나 거론해야할 부분은 공간성7)이다. 이것의 기초는 화면에 각인된 수평적인 선들과 밑바탕 위에서 섬세하게 새겨진 띠로부터 출발한다. 이 선과 띠는 일종의 요철효과를 발생시키며, 동시에 실제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또한 깊이를 포용하며 창출되는 명암효과에 따른 3차원의 입체감은 그 깊이의 존재를 재차 각인시키는 성분이 되고, 그로 인해 회화는 매우 다차원적으로 변모한다.(캔버스 틀을 재료로 한 작업과 선을 늘어뜨린 설치작업 등에서 강조되는 다차원성은 홍미희 작업을 시각 너머로까지 이끄는, 풍부한 미감을 유발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홍미희의 작업은 수평과 수직 간 평행구조 내에서 조응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물리적 영역 외부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담고 있지만, 근작 <Inter-Painting>(2021) 연작에서 발견되듯 공간의 수용에 있어 그림자 또한 영역을 점층 점유하는 역할을 한다. 손으로 절단해 일정한 간격으로 붙인 보드지는 누적되면서 동시에 그림자를 만들고, <Pink Shadow>(2021) 시리즈에서처럼 이 또한 하나의 조형적 성분이 된다. 따라서 홍미희의 작업은 사각 내에서 종료되는 게 아닌, 공간 전체의 부분으로 존재한다는 게 옳다.
지금까지 미술사적 맥락과 조형적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해석했다면, 이번엔 작업의 근원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뿌리를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창작의 목적, 그 중심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인 탓이다.
때문에 홍미희 작업에서 살펴봐야할 마지막은 ‘흔적’과 ‘존재’이다. ‘흔적’과 ‘존재’8)는 일차적으론 표상체계의 문법에 의존한다. 방법 면에서 존재란 흔적의 유무를 침하시키거나 외면할 이유9)가 될 순 있어도 시각예술에선 존재가 곧 흔적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홍미희의 작업은 예술의 의미를 표(表)와 표(表) 되지 않은 것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 의해서 끊임없이 물으며 답하는 방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간과하면 안 될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인간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작가는 2009년 어느 글에서 “변화를 꿈꾸지만 본래의 것을 버리지 않은 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도전은 공동체 생활에서의 한 개인을 대변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쌓여가면서 여러 규칙이 복합적으로 관계하며 공존하는 모습이 딱딱한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과도 닮아있다.”고 덧붙였다.10)
결국 홍미희의 ‘저부조 회화’는 예술과 삶, 그 기호와 기호 간의 차이가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는 시각이며 한편으론 본질의 외화로서 정화된 감정을 현현(顯現)하려는 그만의 어법이랄 수 있다. (현현은 그가 왜 그렇게 엄청난 노동과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작업을 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정당성’과 결이 같다. 그건 달리 말해 살아감, 살아내기 위함이다. 필자는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그러므로 물질적 결과는 존재를 미학의 문제로 치환한 삶의 텍스트화11)와 진배없고, 그의 작품들은 내면과 외연의 종횡, 실존에 관한 진술을 응축, 집약의 과정 아래 담은 하나의 구조체라 해도 그르지 않다. 이는 달리 말해 반복을 통한 다층적 관계와 평평한 집적, ‘저부조 회화’에서 읽는 존재론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작업을 제대로 보려면 ‘존재의 부정적 양태들마저도 존재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삶이던 작품이던 어떤 존재의 현전이란 일관된 행위의 양태나 끊임없는 차이 그리고 반복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보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차연(差延)도 그의 작업을 판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13)
  • 1) 개념미술은 1960년 헨리 플린트의 제안과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소고』에서도 그 뜻과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 2) 1960년대 초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 미술운동.
  • 3) 전설적인 작업인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1965)는 개념미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상징성을 지닌다.
  • 4) 저부조 회화란 평면에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기법내지는 평면과 입체 사이의 작업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이다. 아주 간략하게는 ‘입체회화’, ‘회화적 조각’이라 해도 무방하다.
  • 5)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에 따르면 언어는 차이에 따라서 의미를 갖는다. 이를 미학에 대입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 6) 색은 팔레트에서 무의식적으로 선택된 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이다. 여기서 ‘계산’은 건축성이 돋보이는 모든 축적의 결과까지 포괄한다.
  • 7) 나아가 작가는 측면까지 작업의 연장으로 삼는데, 공간점유율을 높이는 확장성이 녹아 있다는 건 그의 저부조 회화가 지닌 흥미로운 지점이다.
  • 8) 그의 작품 <Expanding Space>(2021)을 보라, 존재와 흔적에 관한 뚜렷함이 있다.
  • 9) 에두르는 감이 있어 콕 집어 말하자면 흔적=행위에 대한 묘사이다.
  • 10) 단아한 작품은 삶의 지향성을 가리키나, 작업 행위에 의한 ‘겹의 겹’은 서로 연결된 인간사를 관통한다. 특히 조형에 있어 지난한 시간의 집적과 반복은 또 다른 공간에서 펼쳐낸 복잡한 인생 여정의 그것과 닮아 있다.
  • 11) 이는 일종의 실재가 고의적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방식으로써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곳엔 홍미희라는 ‘나’도 들어 있다.
  • 12) 나를 부정하는 모든 것마저 존재로서 받아들일 때 삶의 윤곽은 명료해진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DeL’ existence à l’existant)』, 1947
  • 13) 모든 걸 떠나 홍미희가 삶과 존재를 녹여내는 방법은 실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여러 연작들에서 조금씩, 조용히, 서서히, 알 듯 모를 듯, 서서히 드러난다. 쉬운 파악은 아닐지라도 가만히 보고 또 보면 어렴풋이나마 확인된다.